선을 지키는 과정에서 수단의 정당성이 갖는 의미
어느 드라마 대사가 SNS에 자주 등장한 적이 있다.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 악은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욕망의 실현을 향해서만 질주하면 되기 데 따른 것이다.
어느 드라마 대사가 SNS에 자주 등장한 적이 있다.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 악은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욕망의 실현을 향해서만 질주하면 되기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선은 이 방법이 옳음이라는 목적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지, 이 행위가 지향하는 것이 선이 맞는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선은 수단을 가려야 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선이 승리하는 것을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그래서 선이 악보다 우월한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경고처럼 현실에서 선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유혹은 ‘악의 수단’을 빌려 쓰고 싶은 충동이다.
악을 처단하기 목적으로 똑같이 잔인해지거나, 선을 이루기 목적으로 똑같이 편법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선은 시험대에 선다. 선한 목적을 목적으로서이니 수단은 조금 타협해도 되지 않나 하는 유혹은 강력하다.
그러나 악과 똑같은 수준에서 움직여 얻은 승리는 선의 승리라 할 수 없다. 악과 같은 수준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선이 선임을 유지하는 것, 바로 그것이 어렵고도 가치 있는 일이다.
많은 드라마가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주거나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일상에서 무심코 악에 참여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주면서 끝이 난다. 기회주의적이고 요령만 피우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오디세이’가 인기 있었던 것도 이런 생각의 흐름과 닿아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원전과 달리, 영화에서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계략을 거쳐 승리한 것을 자책한다.
자신이 그렇게 계략을 거쳐 승리했기에 이제 세상에서는 제우스의 법이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제우스의 법은 낯선 사람을 변장한 신으로 대하라는 환대의 규칙이다). 제우스의 법을 깨뜨린 오디세우스는 낯선 곳에서 환대가 아니라 무조건적 공격을 받는 경험을 한다.
환대의 규칙을 깬 자신의 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좋은 행위는 따라 배우는 데 노력이 들지만, 나쁜 행위는 따라 배우지 않는 데 노력이 든다.
누군가가 규칙을 깨고 이득을 얻으면 그 행위에 관해 처음에는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들끓는다. 그러나 곧 그러한 방식으로 이득을 얻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인 전략으로 학습된다.
그래서 점점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예전에는 지킬 것을 지키면서 현실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을 두고 ‘사람이 착하기만 해서’라고 했었다.
그러다가 ‘착하다는 건 무능하다는 거다’라는 말이 들리더니 이제는 아예 ‘바보 같다’고 한다. 그렇지만 ‘바보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선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키고 인간으로서의 자존도 지킨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승리와 달리, 무력하기에 아름다운 승리이다.
B.Ha--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