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포기해도 응급의료비를 내야 하나…가족 상환 의무의 범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빚이 많아 상속포기까지 마쳤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빚이 많아 상속포기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2년쯤 지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아버지가 생전에 내지 못한 응급실 진료비를 상환하라는 안내가 왔습니다. 상속포기를 했는데도 제가 내야 하나요.”
상속포기를 했더라도 고인이 생전에 내지 못한 응급의료비를 가족이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인 상속채무와 달리 ‘응급의료비용 미수금 대지급금’은 응급의료법이 환자의 배우자와 1촌 직계혈족 등에게 별도의 상환의무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포기를 하면 원칙적으로 고인의 재산과 빚을 물려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속포기까지 끝낸 자녀에게 왜 아버지의 응급실비를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오는 걸까.
법무법인 효민 이승환 변호사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른 대지급금 구상의무는 상속채무가 아니기 때문에 상속포기를 했더라도 상환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병원비 대신 내준 심평원, 자녀에게 돌려달라고 할 수 있어
‘응급의료비용 미수금 대지급제도’는 응급환자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응급의료비를 내지 못했을 때 의료기관 등이 받지 못한 비용을 대신 지급하고 나중에 상환의무자로부터 돌려받는 제도다.
응급환자가 당장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필요한 응급진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마련됐다.
응급의료법 제22조는 의료기관이나 구급차 등을 운용하는 자가 응급의료비나 이송처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 미수금 대지급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심평원이 미수금을 대신 지급하면 환자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 환자의 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등에게 대지급금을 구상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가 1촌 직계혈족에 해당한다.
시행령도 심평원장이 대지급한 금액 전액에 대해 이들을 ‘상환의무자’로 보고 납부를 청구하도록 정하고 있다. 상환의무자가 신청하면 현재 48개월 범위에서 분할 납부도 가능하다.
고인이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이나 생전에 부담하던 일반적인 채무라면 상속인이 상속포기를 했을 때 원칙적으로 이를 승계하지 않는다. 반면 응급의료비 대지급금은 법이 일정한 가족을 상환의무자로 직접 규정하고 있어 단순히 ‘아버지의 빚을 상속받은 것’과 법적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 이 변호사의 설명이다.
● 수년간 연락 끊긴 부모의 응급실비도 내야 하나
그렇다면 부모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거나 사실상 아무런 부양관계도 없었던 자녀에게까지 같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법 조문은 1촌 직계혈족을 상환의무자의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 다만 이 변호사는 실제 부양관계가 전혀 없었던 경우에는 상환의무 자체를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봤다.
이 변호사는 “최근 하급심 판결에서는 부양의무가 있는 1촌 직계혈족이라도 실제로 민법상 부양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상환의무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사례가 있다”며 “가족관계가 단절됐거나 실제 부양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다면 이를 근거로 상환의무가 없다고 다퉈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부모와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당연히 상환의무가 없어지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구체적인 가족관계와 부양관계 등을 따져봐야 한다.
배우자와 여러 자녀처럼 법에서 정한 상환의무자가 여러 명인 경우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응급의료법과 시행령은 상환의무자의 범위와 상환 청구 등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만, 여러 상환의무자 사이에서 최종적으로 누가 얼마를 부담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부 부담비율을 직접 정하고 있지는 않다.
이 변호사는 “상환의무자가 여러 명인 경우의 부담관계는 앞으로 판결이 축적돼 대법원에서 정리될 필요가 있는 문제로 보인다”고 말했다.
● 2년 전 응급실비가 지금 날아온 이유는
진료를 받은 지 2년이 지난 뒤에도 상환 안내가 올 수 있다. 응급의료비 대지급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3년’이 적용된다.
응급의료법 시행령에 따르면 의료기관이나 이송기관이 심평원에 미수금 대지급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은 진료종료일 또는 이송종료일부터 3년이다. 따라서 진료가 끝난 뒤 2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의료기관의 대지급 청구가 늦었다고 볼 수는 없다.
심평원이 상환의무자에게 대지급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구상권에도 별도의 소멸시효가 있다. 응급의료법 제22조의3은 대지급금 구상권을 ‘대지급금을 청구할 수 있는 날부터 3년’ 동안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된다고 규정한다. 시효 중단 등은 민법에 따른다.
따라서 안내문을 받은 시점만 보고 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언제 응급진료가 끝났는지, 의료기관이 언제 대지급을 청구했는지, 심평원의 구상권이 언제부터 행사 가능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 상속포기 서류만 보내면 해결될까
상환 안내를 받은 뒤 이미 상속포기를 했다는 사실만 제시한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청구 자체가 상속채무 승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심평원에 어떤 진료비를 언제 대지급했는지, 자신을 상환의무자로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가족관계가 오랫동안 단절됐거나 실제 부양관계가 없었다면 그 사정도 함께 확인해야 한다.
청구금액이나 상환의무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심평원에 청구 근거와 금액 산정 내역을 확인하고, 상환의무가 없다고 본다면 그 사정을 제시할 수 있다.
이 변호사는 청구금액이나 상환의무 자체에 이의가 있다면 심평원에 관련 내용을 확인해 다투고, 필요하면 법원에 채무부존재확인 소송 등을 제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Byun--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