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확정판결 대상 재판소원, 헌재 판단에 법조계 주목
일명 ‘동의 없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재판소원 심리에 법조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명 ‘동의 없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재판소원 심리에 법조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사안은 법원에서 확정된 무죄 판결을 재판소원으로 취소할 수 있는지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현행 사법체계에서 확정된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절차는 재심인데, 개시 요건이 매우 엄격할 뿐 아니라 억울한 유죄 확정판결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무죄 확정판결을 뒤집는 ‘불이익 재심’은 지금까지 없었다. 법조계에선 이 사건에 대한 헌재의 판단이 재판소원 권한의 경계선을 긋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동의 없는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 A씨가 지인이었던 B씨로부터 유사강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안이다. A씨는 B씨가 성관계를 시도하자 거듭 거절 의사를 전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법원에 출석해 관련 피해를 진술했고 1시간 동안 75차례 거부 의사를 밝힌 녹음도 증거로 제출됐다. 그러나 1·2심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A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상고를 포기하며 지난 3월 무죄가 확정됐다.
A씨는 객관적 물증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지나치게 엄격한 법리를 적용해 성적 자기결정권 등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하며 헌재에 재판소원을 제기했다. 만약 헌재가 A씨의 주장을 인용해 무죄 확정판결을 취소한다면 법원은 B씨에 대한 재판을 다시 해야 한다.
양측의 법리 공방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B씨 측은 최근 ‘헌재가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 일사부재리 원칙에 반한다’는 취지의 서면 의견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무죄 판결이 확정돼 일상으로 돌아간 피고인을 다시 법정에 세우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무너트린다는 주장이다.
그러자 이번엔 A씨 측이 반박 서면 의견서를 헌재에 냈다. A씨의 대리인단은 의견서에서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상소권, 재심청구권 등이 보장되지만 피해자에게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권리가 없다’며 ‘이 상황에서 재판소원마저 보장되지 않는다면 피해자에게는 기본권 침해를 다툴 만한 수단이 없다’고 반박했다.
법조계에서는 헌재의 판단이 재판소원 제도가 앞으로 어떻게 운용될지를 가늠할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행법상 소송의 당사자가 아닌 피해자가 무죄 판결에 대해 재판소원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지, 나아가 재판을 취소해 무죄 확정 판결에 대해 사실상의 ‘불이익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 허용돼야 하는지 등 쟁점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헌환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개인으로부터 형벌권을 위임받은 국가가 소추나 재판과정에서 심각한 위법을 저질렀다면 피해자가 재판소원을 통해 그 권리 침해를 호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헌재 재판연구관 출신의 노희범 변호사는 “법적 안정성이라는 가치는 어느 국가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다”며 “이 원칙을 깰 정도로 청구인 측이 피해자의 재판참여권 침해나 기본권 침해가 심대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소명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사건을 심리 중인 헌재 측의 고민이 엿보이는 장면도 나왔다. 헌재가 지난 1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연구관들을 초청해 연 간담회에서 한 연구관은 독일 측에 “무죄가 확정된 사건의 피해자가 ‘유죄가 선고돼야 한다’며 재판 취소를 청구하는 경우가 독일에 있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독일 측은 “무죄 판결을 확정받았는데 피해자가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이유로 다시 재판을 열도록 요구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피고인이 무죄 판결을 받아 확정된 경우 피해자가 공소참가인(Nebenkläger)의 지위에서 그 확정판결을 깨고 재심을 요구할 헌법상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독일 헌재 측이 설명한 사례는 이스메트 H.(이름 일부 비공개)에 대한 40년 만의 재심의 적법성을 둘러싼 결정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스메트는 1982년 17세 소녀를 강간·살인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이듬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확정받았다. 그러나 2012년 실시된 재감정에서 피해자의 속옷에서 검출된 DNA와 이스메트의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자 뒤늦게라도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분출했다.
독일 의회는 2021년 살인, 대량학살 범죄 등에 한해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는 경우 불이익 재심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했고, 이듬해 재심이 시작되며 이스메트는 다시 구속됐다. 그러나 독일 헌재가 2023년 해당 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며 재심은 그대로 종료됐다. 독일 헌재는 당시 실질적 헌법 역할을 하는 독일 기본법 제103조 제3항의 이중처벌금지 조항이 ‘실질적 정의’보다 ‘법적 안정성’에 우위를 부여했다고 해석하고 이를 근거로 위헌 결정을 했다.
다만 이 결정으로 독일에서 불이익 재심 자체가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다. 독일 형사소송법은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이후에 범행을 자백할 경우와 재판 과정에서 법정에 제출된 서류가 위조됐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경우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불이익 재심을 허용하고 있다.
A씨 측은 독일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A씨 측 대리인단은 “독일 헌재가 심리한 사례는 40년 전 범행에 대해 법이 소급적용된 경우지만 청구인 측은 재판소원 제도에서 규정한 청구기간(판결 확정으로부터 30일 이내)을 지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청구인 측은 나아가 소송 전반에서 피해자 권리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는 독일의 사정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해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도 주장한다. 독일의 경우 피해자가 공소참가인으로서 검사의 공소제기를 감독·견제하고 피고인에 대해 독자적으로 구형까지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피해자가 의견을 진술하는 것 외에는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만큼 재판소원을 통해서라도 권리를 행사할 기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U.Moon--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