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렘키 “처방 마약류 중독, 의료계가 조기 개입해야”
애나 렘키 스탠퍼드 의대 교수는 처방 마약류의 장기 사용과 의료진의 과도한 확신이 중독을 키울 수 있다며, 환자를 탓하기보다 감량과 회복을 돕는 치료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의학과 중독의학을 연구하는 애나 렘키(59) 미국 스탠퍼드 의대 교수는 지난 5~6일 두 차례 서면 인터뷰에서 중독을 현대사회의 역병으로 규정했다. 의료체계와 의사가 문제를 외면하면 중독 확산에 책임이 있다고 경고했다.
렘키 교수는 2016년 저서 중독을 파는 의사들에서 미국의 처방 마약류 대유행을 경고했다. 이 책은 지난해 11월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고 올해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됐다.
그는 현행 의료체계가 중독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적으로 개입하는 데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 처방량은 1990년대와 비교해 2011년 4배 이상으로 늘었고, 함께 사용되는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물 처방 인원은 1996년 810만 명에서 2013년 1350만 명으로 67%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한 의사가 환자의 특정 처방 마약류 복용을 중단시키려 해도 다른 의사가 다시 같은 약을 처방하는 악순환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한국 의료진도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실수에서 배워 처방약 대유행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렘키 교수는 의사가 환자의 오남용과 중독을 알아볼 수 있다고 믿는 과도한 자기 확신을 특히 경계했다. 실제로는 환자가 중독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의료진이 이를 알지 못한 채 중독성 약물을 계속 처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약을 복용한 뒤 증상이 나아졌다는 사실만으로 특정 질환을 입증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은 질환이 없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각성제는 ADHD가 없는 사람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고, 진정제는 불안장애가 없는 사람도 편안하게 느끼게 하며, 오피오이드는 심각한 통증이 없어도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
그는 단기적인 약효가 장기 치료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해결하려던 문제보다 더 많은 부작용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환자가 약효를 느끼면 처방이 자신의 진단에 맞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렘키 교수는 이런 반응만으로 질환의 존재나 장기 복용의 필요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오남용 우려가 큰 대표 약물로는 벤조디아제핀 계열 수면진정제와 졸피뎀 같은 Z-드러그를 들었다. 이들 약물이 2주를 넘어 사용됐을 때에도 효과가 있다는 신뢰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실제 진료에서는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처방되는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렘키 교수는 장기적인 환자 이익보다 환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의료진의 욕구가 장기 처방에 작용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의사가 처방한 약은 중독되지 않을 것이라는 환자의 믿음 역시 잘못된 것으로, 의사 처방에 후광효과를 부여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다만 중독은 회복할 수 있는 질병이라고 강조했다. 중독된 사람도 장기적인 회복에 이를 수 있고, 회복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의 삶도 개선한다는 것이다.
렘키 교수는 의료진이 환자를 비난하는 대신 중독을 치료가 필요한 뇌 질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중독 치료 인프라를 확충하고, 습관성 약물을 오랜 기간 천천히 줄여 중단하도록 돕는 탈처방 클리닉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X.Eom--SG